제7회 예그린뮤지컬어워드 예그린대상 ‘신시컴퍼니’ – 원칙과 기본에 충실한 작품이 감동을 만든다.

“어려운 공연 시장 환경에서 30년 간 꾸준히 활동해온 점을 소중하게 평가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신시컴퍼니 박명성 프로듀서

신시컴퍼니 박명성 프로듀서

박명성 프로듀서가 이끄는 신시컴퍼니가 제7회 예그린뮤지컬어워드 ‘예그린대상’을 받는 순간, 오래 전 첫 인상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박 프로듀서를 처음 만난 것은 약 20년 전인 1999년이었다. 당시 그는 신시뮤지컬컴퍼니 대표에 갓 취임한 뒤였고, 뮤지컬 ‘더 라이프(The Life)’ 한국 초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에게 받은 첫인상을 털어놓자면 ‘촌스러운(?) 투박함’이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나눠보고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그 투박함 뒤에 강렬한 에너지와 집념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고교 시절 광주에서 차범석 원작의 연극 ‘산불’을 보고 전율을 느낀 그는 1982년 고교 졸업 후 ‘무작정 상경’해 대학로에 들어왔다. 1984년 연극 ‘님의 침묵’에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연출가 고(故) 김상열과 인연을 맺었고, 극단 신시가 1987년 출범하면서 ‘김상열 사단’의 핵심 멤버가 되었다. “배우로는 무대에 1분 이상 서 본 적이 없어요(웃음). 어느 날 선생님이 부르더니 ‘넌 배우하지 말고 조연출을 해라’라고 하시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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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뮤지컬컴퍼니가 1998년 공연한 ‘더 라이프‘. 박명성 프로듀서의 첫 야심작이다. (신시컴퍼니 제공)

1998년 김상열 선생이 타계하고 1년 후, 대표에 오른 그는 ‘신시뮤지컬컴퍼니’로 이름을 바꾸고 첫 작품으로 브로드웨이 흥행작 ‘더 라이프’의 라이선스 초연을 준비했다. “우리 뮤지컬계에서 최초의 ‘책임 프로듀서’였어요. 기획부터 라이선싱 작업, 투자 유치까지…, 기획부터 ‘쫑파티’까지 다 제 손으로 했습니다. 큰 공부가 된 작품이었습니다.” 요즘 팬들은 이해 못하겠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원작자와 정식 계약을 하지 않고 불법으로 공연하는 게 태반이었다. ‘더 라이프’는 우리 뮤지컬 공연사에서 최초로 브로드웨이와 정식 계약을 맺은 작품이다. 이뿐 아니다. 배우 및 스태프와 정식으로 계약서를 쓰기 시작했다. 이 또한 공연계의 투명성이 자리 잡기 시작하는 전환점이었다. ‘더 라이프’를 통해 브로드웨이와 신뢰를 쌓은 그는 곧바로 ‘시카고'(2000) ‘렌트'(2000) 등 해외 대작들을 잇달아 올렸다. 당시만 해도 ‘와, 말로만 듣던 ‘시카고’를 서울에서 보다니…’란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런 콘텐츠들을 통해 신시뮤지컬컴퍼니는 폭풍질주를 하며 공연시장을 선도하는 중심축으로 급부상했다.

“무엇보다 브로드웨이와의 시차를 많이 줄였다는데 자부심을 느낍니다. 팬들과 관계자들이 최고의 뮤지컬을 서울에서 감상하면서 우리가 뮤지컬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2005년에는 디즈니 뮤지컬 ‘아이다’를 LG아트센터에서 8개월간 장기 공연하며 한국시장의 규모와 가능성을 실험했고, 2007년에는 ‘갬블러’로 인연을 맺은 작곡가 에릭 울프슨을 영입해 차범석 원작의 ‘산불’을 토대로 한 창작뮤지컬 ‘댄싱 섀도우’를 내놓았다. 45억원이라는,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투입한 이 작품은 비록 흥행에 실패했지만 외국의 작곡가와 연출가, 안무가를 영입해 창작뮤지컬을 만든 최초의 시도였다. 이 모델은 현재 국내 뮤지컬 시장에서 ‘주류’로 자리 잡았다. “세계적인 크리에이터들과 작업하면서 우리 배우들, 스태프들이 눈을 떴어요. 미래 뮤지컬에 대한 투자였습니다. 배우의 기량이나 무대 메커니즘이 크게 좋아졌잖아요. 덕분에 이제는 우리 크리에이터들이 충분히 세계 수준의 뮤지컬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08년 그는 또 다른 변신을 시도한다. 신시컴퍼니로 회사 이름을 바꾸고 연극도 함께 만들기 시작했다. 극단 산울림의 임영웅 대표와 배우 손숙 씨 등이 “차범석 희곡상을 받은 ‘침향'(김명화 작)을 만들 사람은 박명성 밖에 없다”고 ‘압력’을 준 게 계기였다. 연극에서 출발한 그는 “아, 나는 연극을 다시 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구나”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특유의 밀어붙이기로 뚝딱 개명을 했다. “먼저 저지르고 나중에 수습하는 스타일입니다. 공연계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일이 안 됩니다.(웃음) “연극을 다시 시작하고 나서 처음 5년간은 ‘엄마를 부탁해’ 말고는 죄다 흥행에 실패했지만 그 뒤부터는 망한 적이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가을 소나타’, ’33개의 변주곡’, ‘푸르른 날에’, ‘대학살의 신’, ‘레드’, ‘렛 미 인’을 거쳐 현재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 중인 ‘더 플레이 댓 고우즈 롱’에 이르기까지 퀄리티가 입증된 작품만을 엄선해 완성도 높은 무대를 선보여 왔기 때문이다.

“저라고 돈 되는 로맨틱 코미디 연극 안 해보고 싶었겠습니까? 유혹이 참 많았어요. 하지만 어렵사리 이겨내고 지금까지 왔습니다. 관객이 극장 문을 열고 나왔을 때 해답은 주지 못하더라도 숙제는 주는, 이 시대에 필요한 이야기 중심의 작품을 만든다는 신념만은 지키고 싶었습니다.“

아역 배우 트레이닝에만 20개월이 필요한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와 ‘마틸다’ 같은 작품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도 기본을 중시하는 신시컴퍼니의 오랜 노하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도저히 수익을 남길 수 없는 작품이에요.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런 작품들을 통해서 뮤지컬을 만드는 정도(正道)가 이런 거다, 작품의 성패에 상관없이 뮤지컬이란 이런 거다, 이 점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래야 미래의 관객도 창출하고, 팬 저변도 확대하고, 미래의 예술가도 길러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신시컴퍼니 30주년 기념 공연. 시계방향으로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시카고, 연극 더 플레이 댓 고우즈 롱, 뮤지컬 마틸다. (신시컴퍼니 제공)

신시컴퍼니 30주년 기념 공연. 시계방향으로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시카고, 연극 더 플레이 댓 고우즈 롱, 뮤지컬 마틸다. (신시컴퍼니 제공)

신뢰의 벽돌이 하나하나 쌓여 신시컴퍼니는 이제 공연계에서 ‘믿고 보는’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자리 이동이 잦은 공연계에서 장기 근속하는 ‘식구’들이 많다는 것도 신시컴퍼니의 강점이다. 지난 1994년 입사한 최은경 대표를 비롯해 정소애 본부장, 박지형 마케팅실장, 최승희 홍보실장, 김태훈, 이지영, 이재은 감독(연출팀) 등이 모두 15년 이상의 베테랑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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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성 프로듀서는 “프로듀서는 자신만의 색깔이 있어야 한다”며 “서두르지 않고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한다면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떨어지지 않는 뮤지컬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신시를 위해서, 박명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일을 해라’라고 말을 합니다. 스스로 고민하고, 노력하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성취감을 느껴야 자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동안 만든 작품의 숫자만큼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함께 해 준 직원들의 팀워크가 있었기에 늘 새로운 모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2000년대 ‘뮤지컬 빅뱅’이라 불릴 만큼 급성장했던 뮤지컬 시장은 최근 ‘위기설’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침체에 시달리고 있다. 뮤지컬의 ‘산 증인’으로서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너무 상업적으로, 장삿속으로 만들면 안 됩니다. 저도 ‘아이돌 스타를 한 번 써 볼까’ 이런 유혹이 많았지만 참고 인내하면서 장기적인 안목으로 전문 배우들을 키우려고 했습니다”라고 운을 뗀 그는 “중요한 것은 결국 ‘어떤 소재를, 어떤 스토리로 만들거냐’ 입니다. 프로듀서는 자신만의 색깔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이야기를 갖고 완성도 높게 만들면 전 세계 어디 내놓아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몇 년이 걸리더라도 한 작품에 몰입해서 한국을 대표하는 뮤지컬을 만들겠다는 연극정신을 갖고 한다면 충분히 해낼 수 있습니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는 요즘 차분히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30년을 달려왔으니 이제 차세대 인재들에게 자리를 넘겨줘야 할 때가 됐습니다. 가장 모범적이고 정직한 세대교체를 해야 한다는 게 저의 숙제이자 책임입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프로듀서로 살아서 좋았던 점’을 물었다.

“‘다음에는 절대 큰 작품 하지 말아야지’ 결심했다가도 막이 오르고 나면 바로 ‘다음에는 또 뭐 할까’ 이 고민을 하는 게 프로듀서입니다. 그게 숙명이자 행복인거죠.”

신기하다. 20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첫인상 그대로였다.

CREDIT

글. 김형중 

스포츠조선 엔터테인먼트팀 부장

사진. 이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