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팬텀〉을 재미있게 보는 몇 가지 방법
2018 뮤지컬 〈팬텀〉 포스터 이미지 (EMK 제공)

2018 뮤지컬 <팬텀> 포스터 이미지 (EMK 제공)

사람에게 운명이 있다면 작품에도 팔자가 있다 .<팬텀>이 그렇다. 같은 원작을 비슷한 시기에 기획했지만 후속주자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팔자가 꼬였다고나 할까. 이 작품은 언제나 <오페라의 유령>과 비교되면서 이야기됐더랬다. 사실 그런 접근이 이 작품의 고유함을 한눈에 파악하는 데 좋은 방식인 건 맞지만 한편으로는 고유함의 기준을 다른 작품에서 찾는 이율배반이기도 하다. 그래도 이제는 국내에서 여러 번 공연됐던 만큼 작품과 공연에 대한 정보가 많아져 굳이 <오페라의 유령>을 언급하지 않아도 이 작품의 개성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새삼 이 작품을 ‘미리보기’한다면, 무엇을 보는 게 좋을까? 검색하면 다 나오는 이야기를 반복하기보다는 이 작품의 장면을 짚으면서 공연을 더 깊게 볼 수 있는 부분을 찾는 게 더 재미있어 보인다.

2016 뮤지컬 〈팬텀〉 (EMK 제공)

2016 뮤지컬 <팬텀> (EMK 제공)

#1. 왜 ‘팬텀’이 아니고 ‘에릭’일까?

<팬텀>의 주인공에게는 분명한 자기 이름이 있다. 그는 팬텀이 아니라 에릭이다. 이 이름의 의미를 알기 위해선 원작이 쓰인 시대 배경을 살펴봐야한다. 원작자인 가스통 르루의 시대에 ‘괴물 같은 얼굴로 고통 받는 인간’이란 상상 속의 인물이 아니라 실존하는 인물이었다. 다발성 신경섬유종이라는 유전적인 질병 때문에 얼굴 전체가 거대한 혹이 되어버려서 ‘엘리펀트맨’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했던 영국 출신의 청년 조셉 메릭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추악한 얼굴 때문에 짐승과도 같은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섬세한 예술적 감성과 사랑하고 싶은 청년의 마음이 있었으니, 조셉 메릭의 존재는 당대의 사람들에게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깊은 질문과도 같았다.
추리작가이자 저널리스트였던 가스통 르루가 이 사람의 이야기를 몰랐을 리 없다. 그가 저널리스트로서 메릭에 대한 기사를 썼는지는 확인할 길 없지만, 그의 작품 곳곳에서 메릭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이름이 에릭인 것이나, 흉한 외모 때문에 가족에게 버림을 받은 것도 그렇고, 서커스단에서 짐승취급을 받으며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살아온 이력과, 그의 안에 숨겨진 예술적 능력까지. 에릭은 많은 부분에서 메릭과 닮아있다. 현실의 사람들이 메릭의 외모에 집중할 때 작가인 가스통 르루는 메릭의 내면에 있을 슬픔과 분노에 집중했을 터. 그것은 섬세한 한 인간이 학대와 고통 속에서 어떻게 자기를 지켜낼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다름 아니다. <팬텀>의 주인공이 신비한 ‘유령’이 아니라 상처 입은 ‘에릭’이라는 사실은 원작을 진지하게 해석하는 이 작품의 관점을 잘 보여준다.

#2. ‘내가 니 애비다!’의 의미

<오페라의 유령>이 아버지를 찾는 크리스틴의 이야기라면, <팬텀>은 어머니를 찾는 에릭의 이야기이다. 크리스틴에게 아버지는 자기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세계를 상징하고, 에릭에게 어머니는 자기를 받아주는 현실 세계를 상징한다. 크리스틴이 신비롭고 순수한 느낌을 자아내는 것에 비해 에릭은 잔혹한 범죄자의 느낌을 주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어머니가 없는 에릭은 현실 세계에 발붙일 수 없는 추악한 괴물일 뿐이니까. 혹시나 크리스틴이 자기의 얼굴을 바라보고 웃어주는 ‘어머니’일까, 그 앞에서 가면을 벗지만 결과는 비참할 뿐이다.
에릭은 자기의 얼굴을 바라봐줄 사람을 찾지만 그의 얼굴을 보고 도망가지 않은 사람은 이제 아버지 카리에르밖에 없다. 어머니가 에릭의 얼굴을 보는 사람이라면, 아버지는 에릭에게 얼굴을 주는 사람이다. 아들의 추한 얼굴에 가면을 씌워주며 새로운 얼굴을 만들어준 사람이 바로 카리에르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들의 맨얼굴을 보지 못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아들을 ‘유령’으로 소개할 뿐이다. 그런 그가 자신이 아버지임을 밝히는 것은 비로소 아들을 유령이 아닌 실체로 인정하겠으며 얼굴을 마주하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감동적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 장면에서 관객들은 언제나 피식 웃음을 날린다. ‘내가 니 애비다’라는 대사의 한국적 맥락 때문이기도 하겠고, 나쁜 남자의 뒤늦은 자기반성이 재수 없어서이기도 하겠지만, 극적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이 대사가 나올 때 웃음이 새지 않는다면 이 공연이 그만큼의 설득력을 만들어냈다는 증거일 터. 매번 공연에서 지켜볼 만한 지점이다.

#3. 가사 없는 노래와 치장 많은 가면

2016 뮤지컬 (EMK 제공)

2016 뮤지컬 <팬텀> (EMK 제공)

에릭과 크리스틴은 서로에게 매혹되지만 그것이 사랑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은 진즉에 예상가능한 일이다. 그들의 서로에게 느낀 매혹은 실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릭의 착각은 소리의 매혹을 노래의 교감으로 받아들였다는 데 있다. 크리스틴이 에릭 앞에서 부르는 노래를 들어보라. 놀랍게도 그 노래에는 선율도 가사도 담겨있지 않다. 음악은 노래의 도구일 뿐 마음을 담는 그릇은 아닌 것이다. 두 사람의 레슨 장면이 그렇게 애틋하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개인 셈이다. 불쌍한 에릭. 정말 크리스틴은 에릭에게 잠깐의 진심도 없었을까? 마지막 즈음에 에릭을 향한 크리스틴의 노래에 진심어린 가사가 있긴 하다. 얼굴을 보여 달라고 매달릴 때.

이것은 크리스틴의 착각에서 비롯된 애원이다. 그녀에게 에릭은 ‘감히 쳐다볼 수 없는 얼굴’이다. 크리스틴을 압도한 것은 음악선생으로서의 에릭인 바, 조심스레 그와 마주할 때마다 그의 얼굴은 충만한 표정(가면!)으로 빛난다. 그녀에게 에릭의 진짜 얼굴은 이 가면인 셈이다. 그러니 가면을 벗은 얼굴은 크리스틴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법. 받아들일 이유가 없는 얼굴을 보았을 때 그녀는 뒷걸음쳐버린다. 죽어가는 에릭의 맨얼굴에 가면을 씌워주는 크리스틴의 마지막 인사는 자기를 바라보는 에릭의 진짜 얼굴을 찾아줌에 다름 아니다. 가면으로 살아온 자, 가면으로 돌아갈지니. 아름다운 음악에도 화려한 가면에도 이들의 비극적인 사랑의 메시지는 곳곳에 숨어있다.

<팬텀>은 생각할 재료가 즐비하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작품이다. 제목부터가 질문이다. 누가 유령이고 괴물일까? 아무도 얼굴을 마주하지 않을 때 유령이 되고, 아무도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을 때 괴물이 된다. 하지만 여기에서 에릭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그는 더 이상 괴물도 유령도 아니다. 이런 의미가 부담스러운가? 그렇다면 그저 눈을 감고 음악을 들어도 좋다. 그것도 이 작품에서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재미일 테니까.

CREDIT

글. 정수연
뮤지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