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게, 매일을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연극 [에쿠우스] 배우 인터뷰 (장두이, 전박찬)

1. 에쿠우스_컨셉사진(심은우,전박찬,장두이)(2)

열일곱 살 소년 알런(전박찬·왼쪽)은 왜 말의 눈을 찔렀을까. 상담을 통해 소년의 마음을 파고들며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장두이)는 혼란에 빠진다. 스스로 신(神) ‘에쿠우스’를 만들어낸 뒤 살해한 소년의 이야기를 통해 원시와 문명, 본능과 이성, 무질서와 질서, 인간이 품은 종교성의 근원을 탐구하는 연극 ‘에쿠우스’ (사진제공 극단 실험극장)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 22일 개막 연극 ‘에쿠우스’

말의 눈을 찌른 소년 ‘알런’ 전박찬

소년을 상담하는 ‘다이사트’ 장두이

그 자식의 정신이 온전하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 아버지는 구식 사회주의자이며 무신론자. 아들인 17세 소년 알런은 해변에서 처음 본 말의 형상과 어머니가 주입한 유일신 개념을 조합해 자신만의 신(神), 에쿠우스를 만들어낸다. 자기가 만든 신을 스스로 살해하듯 말의 눈을 찔러 죽인 뒤, 알런은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를 만난다. 알런의 원시, 본능, 무질서와 다이사트의 문명, 이성, 질서가 무대 위에서 관념이 육화(肉化)한 뱀처럼 뒤엉킨다.

연극 ‘에쿠우스’가 22일부터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다시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영국에서 1973년, 국내선 1975년 극단 실험극장이 처음 무대에 올린 뒤 40여 년이 훌쩍 지났다. 대학로 한 카페에서 만난 ‘다이사트’ 장두이(66)와 ‘알런’ 전박찬(36)에게 단도직입 물었다. ‘왜 여전히 에쿠우스인가?’

2. 에쿠우스_연습사진(전박찬,장두이,코러스)

소년 알런(전박찬·왼쪽)과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장두이)의 연습 장면 (사진제공 극단 실험극장)

“2001년에 처음 이 연극을 봤어요. 남자인 다이사트 박사 역을 박정자 선생님이 연기했던 한태숙 연출님 작품이었죠. 갓 고등학교 졸업한 제가 뭘 알겠어요. 그런데 1막이 끝났는데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하겠더라고요. 압도적이었어요.” 전박찬이 반듯한 자기 이목구비처럼 차곡차곡 쌓아올리듯 말했다. “제가 직접 이 연극 무대에 서 보니, 관객은 다이사트와 알런의 모습에서 자기 자신의 어떤 부분을 발견하는 것 같아요. 계속해서 날 것 그대로 질문을 던지고, 관객은 누구나 각자 자기만의 물음표를 갖고 극장을 나서죠. 그런 연극이에요.”

전박찬의 답은 알런처럼 본능에 가까웠다. 장두이는 다이사트처럼 질서 있게 답했다. “죄 지은 비정상 소년을 중년이 상담하는 포맷은 영화나 드라마로 반복 소비됐지만, 이 작품은 그 깊이가 다릅니다. 그리스 신화에 매료됐으나 현실은 껍데기뿐인 삶을 사는 의사 다이사트를 통해 종교성의 문제가 겹쳐지고, 고대로부터의 역사를 통해 인간의 근원적 문제까지 탐구합니다. 양식적인 면에서도 장치를 최소화한 빈 공간 같은 무대에서 배우 연기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어요. 연극의 연극성을 복원하니 오히려 더 연극적 재미가 충만하죠.” 장두이는 “1월 공연 땐 서른 일 곱 번 봤다는 관객도 있었다. 볼 때 마다 느낌이 다르고, 양파껍질 벗기듯 새로운 걸 발견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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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박찬은 “대본을 처음 받은 날 표지에 ‘낯설게’라고 썼다”고 했다. 장두이는 “매일 처음처럼 연기하려고 한다. 1월 공연은 37번 본 관객도 있었다”고 했다 (사진제공  충무아트센터)

“이전 공연 땐 37번 봤다는 관객도…

 볼 때 마다 새로운 걸 발견하게 돼”

얄밉도록 연기 잘하기로 유명한 두 배우다. 전박찬은 최근까지 극단 산울림 ‘이방인’의 뫼르소였고, 장두이는 국립극단 ‘조씨고아’의 잔혹한 장군 도안고였다. 1월 공연에 이어 두 번째 알런과 다이사트로 만나지만 에쿠우스 무대는 늘 새롭다. 

장두이는 “연기자로서 힘들지만 묘미가 있는 역할”이라고 했다. “대개 연극에선 한 인물에 주어지는 캐릭터를 두 세 겹 정도로만 표현하면 해결돼요. 다이사트는 달라요. 하면 할수록 파노라마처럼 넓어지고, 넓게 펼 때는 템포와 리듬이 유연해야 하죠. 알런이 말을 타기 시작하고 그걸 추궁해 들어갈 땐 또 굉장히 깊이 있고 빨라야 하고요.” 장두이는 “브로드웨이에서 리처드 버튼이 연기한 다이사트를 보며 ‘저렇게 강한 눈빛과 정확한 딕션이 있구나’, ‘연기의 진수란 이런 거구나’ 싶어 소름끼친 적이 있다. 에쿠우스는 감성만 갖고 할 수 없는, 지성이 뒷받침돼야 연기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했다.

전박찬에게 에쿠우스의 알런은 ‘인생 배역’이다. 첫 알런을 맡은 2014년 오디션이 그가 지금껏 붙은 단 한 번의 오디션이다. “중간에 잘릴 수도 있겠다 생각했는데 다행히 그 해 공연을 완주했어요. 그 뒤로 더 많은 다른 역할을 맡을 수 있게 됐고요. 알런은 마약 같아요. 허리 아플 정도로 힘들지만 받는 에너지도 엄청나고. 대본 받은 첫날 표지에 ‘낯설게’라고 썼어요. 모든 장면을 다 처음처럼, 처음 무대 위 공간에 들어서고, 처음 다이사트를 만나고, 둘이 처음 대화하는 마음으로 무대에 서고 싶어요. 즐겁게 그 낯선 순간들을 살아내는 것. 매일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처럼.” 

“삶의 기괴한 순간, 누구에게나 있어

…알런은 어쩌면 가장 보통의 존재”

알런은 복잡한 캐릭터다. 그저 생각 많은 문제 소년이라 여기기엔 가볍고, 실존이니 고뇌 같은 꼬리표를 달기엔 너무 무겁다. 무대 위에서 알런이 되는 전박찬은 “가장 보통의 존재라고 생각하고 접근한다.”고 했다. “소년이 저지른 사건은 끔찍하고, 하는 행동은 기괴하죠. 그렇다고 사이코패스 같은 스테레오타입은 아니에요. 받아들여지기 힘든 지점이 있지만, 실은 누구한테나 그런 면이 있지 않나요? 외롭고 자기만의 고뇌가 있고…. 알런은 그런 게 극대화됐을 뿐.” 전박찬은 “실은 저, 굉장히 독할 때가 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고, 끔찍할 정도로 말을 하지 않는다. 공연장에 오고 무대에 서고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의 자신이 실은 굉장히 낯설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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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우스의 ‘알런’ 전박찬 / 에쿠우스의 ‘다이사트’ 장두이 (사진제공 충무아트센터)

장두이는 “난 찬이 나이에는 기괴한 일을 즐겼고 많이 한 편”이라고 했다. “미국에서 올 누드 작품만 세 편 공연했어요. 지금도 공연에는 금기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이 작품은 알런이 이끌어가는 극이고, 알런이 시시각각 변해가는 과정이 흥미로워야 해요. 어쩌면 지금 시대를 사는 누구나에게 어떤 순간 삶은 기괴하지 않나요? 에쿠우스는 그런 공기를 전해야 해요. 공연마다 다른 관객, 그들과 부딪히는 공기, 그리고 소통.”

“마음과 생각의 근원적 부분 건드리는

미묘하게 다른 세계로의 여행 같은 작품”

전박찬에게 장두이는 ‘책으로 먼저 만난 선생님’이다. 중학교 때 소년 전박찬은 동네 송파도서관에 있던 희곡집을 전부 읽었다. 극작가 윤영선 희곡집의 표지 사진이 장두이가 출연한 ‘맨하탄 1번지’ 사진이었다. 전박찬은 장두이가 미국에서 돌아온 뒤 처음 출연한 ‘바다의 여인’도 봤다. “실은 연습 전에 좀 부담스러웠어요. 책에서 보던 분과 눈을 맞추고 연기를 한다니! 알런이 무대에서 까불다가, 다이사트와 눈이 마주쳐 무안해지는 장면이 있거든요. 그 때 장두이 선생님의 눈을 보면 딱 옴싹달싹 못하게 돼요. 그 느낌이 너무 필요한 순간이거든요. 그런 순간 때문에 선생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어요.” 그는 “연습하면서 새로 시도해보고 싶은 게 생기면 전에 없이 쿡 찔러 보기도 하는데, 선생님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다 받아주신다. 커튼콜 뒤 무대에서 내려올 때 ‘오늘도 최고였어.’ 하며 엄지를 척 올려주시면 그 순간 급속 재충전되는 느낌”이라고 했다. 무대에서 다이사트의 배에 알런이 머리를 파묻듯 안기는 장면이 있다. 전박찬은 “장두이 선생님과 그 장면을 할 때 아버지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장두이가 대견한 아들 바라보듯 흐뭇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도 그 장면이 참 좋아요. 알런이 와서 다이사트를 안았을 때의 그 느낌. 이 소년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그런 책임감을 느끼며 교감하는 순간이죠.” 

6. 에쿠우스_연습사진(전박찬,코러스)

에쿠우스의 ‘알런’ 전박찬의 연습 장면 (사진제공 극단 실험극장)

에쿠우스는 종교적 혹은 영적인(spiritual)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변(思辨)이 물질로 육화하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포 혹은 찬양의 대상이었다. 장두이는 “서구에선 이미 1960년대부터 심리학적 연기는 연기론의 한 주제로 깊이 연구됐다. 우리 연극에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했다. “광기, 그리고 일종의 신들림인 트랜스 상태, 그러니까 우리 문화 전통에선 ‘굿’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요소가 있죠. 사고와 마음의 근원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요소들이 연극 안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전박찬은 배우로 자리 잡기 전에 조명 일을 많이 했다. 그는 “충무아트센터에서도 많은 작품 조명 일을 했었다”고 했다. “조명을 설치하고 다른 배우들이 공연하는 것만 봤었거든요. 그 극장에 배우로 들어가는 건 처음이네요. 실은 제가 조명 설치했던 극장들 지금 하나씩 다 찍고 있어요. 대학로 TOM, 혜화동1번지, 예술의전당…. 다 배우가 되기 전에 조명 스태프로 경험했던 극장들이에요.” 

장두이는 “처음 공연 땐 작품 속을 달리는 것에 집중했다면, 이번엔 넓은 의미로 작품을 빨아들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굉장히 흥분되고, 훨씬 심도 있는 연기를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전박찬은 “나는 스스로 연극에 뿌리 내린 나무 같다고 생각하는데, 그 나무의 가장 특이하고 큰 가지가 에쿠우스”라고도 했다. “이 작품, 저한테는 하나의 여행 같아요. 뭔가 내가 사는 것과 미묘하게 다른 세계로의 여행. 관객 분들도 그 여행 속으로 손잡아 이끌어 드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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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학로 한 카페에서 인터뷰 중인 연극 ‘에쿠우스’의 두 주역, 장두이(왼쪽)와 전박찬 (사진제공   충무아트센터)

CREDIT

글. 이태훈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