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한 것은 황홀하다

시대의 영웅 ‘돈키호테’ 이야기

어둡고 뒤숭숭한 시대는 영웅을 필요로 한다. 누군가가 나타나 이 밑바닥에서 우리를 구원해줄 거라고 믿고 싶어진다. 나도 극장이나 소설의 현실 도피를 좋아하지만 수퍼히어로 영화는 즐기지 않는다. 캐릭터가 비현실적이라 주인공에 감정이입하기 버겁다. 평범한 인물이 특수한 상황에 빠지는 이야기에 끌리는데 수퍼히어로 영화는 정반대다. 매우 특출난 인물이 무능한 대중 속으로 툭 던져지는 식이랄까. 쾌감을 극대화하려는 설정이겠지만 옷이 다 찢어져도 팬티는 말짱한 헐크처럼 어정쩡하고 마뜩잖다.

돈키호테: 인지니어스 젠틀맨 오브 라 만차(2015)

돈키호테: 인지니어스 젠틀맨 오브 라 만차(2015)

스페인 작가 세르반테스가 지은 ‘돈키호테’는 세상에 나온 지 400년이 넘었다. 이 소설 또한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수퍼히어로 영화와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받았고 불멸의 고전이 되었다. 자신을 영웅이라 믿고 풍차를 향해 돌격하는 라 만차의 돈키호테는 독자나 관객을 지켜주기는커녕 독자나 관객이 구원해야만 하는 병든 늙은이처럼 보인다. 현실에서 벗어나 이상과 싸우는 그의 투쟁은 처음엔 그저 눈물겹다.

2002년 노르웨이 북클럽에서 세계 54개국 저명한 작가와 비평가를 상대로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문학작품’을 선정하는 설문조사를 했다. ‘돈키호테’는 당당히 1위로 꼽혔다. 또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했다. “‘돈키호테’보다 더 숭고하고 박진감 넘치는 픽션은 없다”고. ‘돈키호테’ 이후에 쓰인 소설은 ‘돈키호테’를 개작한 것이거나 그 일부를 쓴 것이라는 견해까지 있다.

세르반테스는 해적과 싸우다 한쪽 팔을 쓸 수 없게 된 상태에서 1605년 ‘돈키호테’ 1권을 출간했다. 당시 유행하던 기사(騎士) 소설을 패러디해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다른 작가가 무단으로 속편을 출간할 정도였다. 세르반테스는 1615년 2권을 펴내고 이듬해 숨을 거두었다. 한동안 잊혀졌던 이 작품을 독일 낭만주의자들이 ‘현실과 이상의 불일치’라는 관점으로 재조명했다. 작가와 작품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고 20세기 들어 실존주의가 등장하자 인간 존재와 실존, 언어의 역할 같은 주제를 ‘돈키호테’에서 읽어내기 시작했다.

‘돈키호테’ 1, 2권을 우리말로 완역한 안영옥 고려대 교수는 “우리는 흔히 돈키호테를 허황된 꿈을 꾸다 망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며 “그는 현실에 패배한 것이 아니라 현실을 변화시켰다”고 설명한다. 돈키호테는 약자를 돕고 불의를 바로잡고 정의를 세우려다 무너졌지만, 자신이 변화시킨 시종 산초에 의해 유토피아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돈키호테는 올 여름 한국 극장가에서도 짱짱히 살아 있다. 최근 폐막한 제3회 충무로뮤지컬영화제는 할리우드 영화 ‘맨 오브 라만차’(감독 아더 힐러)로 마침표를 찍었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팬들이 일찌감치 한 회분 객석을 매진시켰다고 한다. 유니버설발레단이 7월 20~22일 충무아트센터에 올린 발레 ‘돈키호테’도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오디컴퍼니가 제작한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는 7월 27~29일 고양아람누리에서 개막한다.

영화와 뮤지컬은 소설 원작과 비슷하게 흘러간다. 무대는 스페인의 지하 감옥. 신을 모독한 죄로 끌려온 작가 겸 배우 세르반테스는 자신에게 익숙한 형태의 변론을 요청하고, 죄수들을 뽑아 즉흥극을 벌인다. 스스로 돈키호테라고 주장하는 노인은 세상을 지독한 감옥이라 부르고, 악이 돈을 벌고 선은 무일푼이 되는 사회에 분노하며, 불의를 바로잡으러 모험을 떠난다.

영화에서는 남자 주인공 피터 오툴이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를 오가며 파워풀하면서 균형 잡힌 연기를 보여준다. 이탈리아 명배우 소피아 로렌이 알돈자·둘시네아 1인2역을 맡았다. 드라마가 응축된 ‘이룰 수 없는 꿈’을 비롯해 ‘맨 오브 라만차’ ‘둘시네아’ 등 돈키호테가 부르는 노래의 감정은 인물, 이야기와 단단하게 뭉쳐져 집중력을 높였다. 오그라뜨린 몸과 능청스런 말투로 빚어낸 노역(老役)이 퍽 희극적이었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는 지난 10년간 국내에서 흥행 불패 신화를 써왔다. 조승우·정성화부터 올해 오만석·홍광호까지 실력파 배우들이 남자 주인공을 빚어냈다. 풍차에 창을 겨누고 알돈자의 걸레에서 향기를 맡는 돈키호테의 착각이 싫지 않다. 세계를 자신의 헛것(이상) 쪽으로 잡아 끄는 인물이라서 더 큰 감동을 준다. “이 뮤지컬을 보고 인생에 활주로가 펼쳐지는 기분이었다”는 조승우의 고백처럼, 순간이 영원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증명하는 작품이다. 알돈자의 가창력, 산초의 유머도 이 드라마를 잘 지탱한다.

희극 발레 ‘돈키호테’는 내용이 사뭇 다르다. 남녀 주인공은 이발사 바질과 선술집 딸 키트리. 제목과 달리 돈키호테는 둘의 결혼을 성사시키는 조연일 뿐이다. 키트리와 바질의 사랑과 모험을 따라가는 ‘돈키호테’는 투우사와 집시들의 춤, 빠르고 경쾌한 밍쿠스의 음악이 돋보이며 스페인의 정열이 물씬 배어난다.

스위스 로잔콩쿠르, 불가리아 바르나콩쿠르, 러시아 모스크바콩쿠르 등 세계적인 발레 콩쿠르를 현장에서 보았다. 올해 ‘브누아 드 라 당스’를 수상한 파리오페라발레단의 박세은을 비롯해 꽤 많은 무용수가 ‘돈키호테’를 경연작으로 골랐다. 키트리만큼 적극적이고 발랄한 발레 캐릭터는 드물다. 왼발을 축으로 해 오른발로 바닥을 차 돌리는 32회전 푸에테 등 화려하고 아름다운 기술을 보여줄 수도 있다.

돈키호테의 묘비명은 ‘미쳐서 살다가 정신 들어 죽었다’로 끝난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가 제정신으로 돌아와 고향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돈키호테는 허무맹랑한 기사도 소설을 읽느라 인생을 낭비한 것을 후회한다.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만 좇던 삶이 실패작이었음을 인정한다. 비평가들은 ‘돈키호테’의 문학사적 가치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정신’에서 나왔다고 본다. 미치광이를 등장시켜 중세 기사도 문학의 문법을 탈피했고 영웅이 아닌 불완전한 개인을 주인공으로 삼는 근대소설의 기초를 닦았다.

“네가 하는 예술은 참 공허한 것 같아. 그러니까 잘해. 사회가 너희 같은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있으니까 말이야.”

어느 변호사가 고교 후배인 시인에게 했다는 말이다. 변호사는 생산적이지만 지루한 직업이고 예술가는 비생산적이지만 매력적인 직업으로 비치는 모양이다. “예술을 창작하고 해석할 때 행복한 이유는 자신의 평범하고 궁색한 처지를 타인과 함께 지각하고 나누면서 인간적으로 갱신되고 고양되기 때문”(시인 심보선)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까스로 자유를 되찾고 세계의 비참함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 그렇듯이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그래서 시대를 초월하는 고전이 되었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돈키호테는 삶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그래야만 하는 것으로 고쳐서 바라본다. 그렇다면 싸워야 한다.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싸움 이길 수 없어도/ 슬픔 견딜 수 없다 해도/ 길은 험하고 험해도” 가야만 하는 ‘불가능한 꿈’이다. 그 길 위에서 승패는 하찮은 것이다. 돈키호테의 죽음 앞에서 이상주의의 상실을 슬퍼하지만 그 눈물은 흘릴 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들이 모여 다른 낯선 사람들을 구경하는 연극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저마다 다양하고 완고하고 흥미로운 방식으로 손상되어 있다. 누구나 가끔 ‘나는 왜 이렇게 비정상인가’ 자문하게 된다. 자동차 타이어가 틀어졌을 경우에는 ‘휠 얼라인먼트’로 정렬 상태를 바로잡는다. 인생도 살다 보면 어떤 부분에서 평형을 잃고 기울어질 수 있다. 그게 정상이다. 불균형이나 결핍을 겪지 않는 게 어쩌면 더 불행한 일이다.

소설 ‘돈키호테’는 터무니없는 무용담이 아니다. 처음엔 낄낄대며 웃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울게 되는 책이다. 사람들은 현실이 황폐할수록 문학이 그려낸 아름답고 이상적인, 그래서 불가능한 세상에 끌린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통해 현실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퍼뜨렸던 것이다. 불가능한 것은 그래서 황홀하다.

CREDIT

. 박돈규
조선일보 주말뉴스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