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마치 꽃인 듯, 눈물인 듯” 소리꾼 장사익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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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홍성군 광천읍은 젓갈과 김으로 이름난 고장이다. 가공 공장이 많을 뿐, 산지(産地)는 아니다. 광천이 고향인 남자는 어릴 적 웅변한답시고 산에 올라가 목청을 틔웠다. 젊을 땐 객기가 있었다. 상고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3년간 가수학원에 다녔다. 현실에 치여 꿈을 접었다. 이리저리 직업을 옮겨 다녔다. 딸기 장수부터 카센터 직원까지 무려 열다섯 가지다. 인생은 정처 없이 돌고 돌았다. 1994년 마흔여섯 살이 되서야 그는 마침내 긴 유랑을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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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장사익(69). 생각()’에 날개()’을 쓴다. 그는생각이 많아서 날아다녀요. 땅에 안 내려가. 현실적이지 않은 거요라며 웃었다. 현실을 벗자 비로소를 찾았다는 것이다. 꿈이 높아서 직업에 적응을 못한 거예요. 다 때려치우고 내가 하고자 하는 걸 전력투구하니까 되더라고.” 장사익은 인생을 배우고 나서 가수가 된 셈이다. 여느 가수들과는 정반대다. 노래란 인생을 얘기하는 거예요. 젊은 가수들은 경험이라곤 사랑과 이별밖에 없잖아요. 저는 인생 굽이굽이를 돌았지요. 말이 그렇지 열다섯 번이나 잘리고. 하하하. 쓰러져도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알게 모르게 비축하고 나서 가수가 된 거예요.”

열여섯 번째 직업으로 가수가 된 남자는 웃음이 참 많다. 자연스럽게 얼굴에 주름이 패였다. 손녀가할아버지 얼굴에 왜 그렇게 줄이 많아?” 물었을 때 장사익은 이렇게 대꾸했단다. 저기 나무 있잖어. 봄여름가을겨울 지나면 나무도 몸 안에 줄이 하나씩 생긴다. 너도 저 나무처럼 몸속 어딘가에 줄이 있을 겨.” 그는주름살은 인생의 계급장이라며추한 게 아니라 잘만 쌓으면 아름답다고 했다.

화창한 봄날이었다. 유리창 밖 산비탈에서 개나리가 성곽을 타고 넘는 게 보였다. 풍경(風磬)에는 물고기가 떨어져 나간 자리에 CD를 매달아 놓았다. 흔들릴 때마다 바람의 노래가 들렸다. 안동의 고택(古宅)에 있던 오동나무 마루를 떼어 와 탁자로 쓴다. 장사익은 찻물을 끓여 다완(茶碗)에 대여섯 번쯤 채웠다. 녹차를 한 모금 마시곤 “(고향 광천이 그렇듯이) 노래도 가공이라고 말했다. 누구나 할 수는 있지만 인생의 양념, 손맛이 들어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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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익은 지난 2월 평창올림픽 폐막식에서 애국가를 불렀다. 요청을 받고 놀랐어요. 얼라, 이 쭈그렁뱅이한테? 애국가 모르는 국민이 어딨어요. 어떻게 부르느냐가 중요하죠. 나만의 맛을 담아 가공해야 합니다. 저는 애국가를 우렁차게 불렀어요. 외국인들이 들을 텐데이 나라 사람들 에너지가 이렇게 크구나. 함부로 하지 말아야겠다싶게요. 그리고 길이를 두 배로 늘여서 불렀어요. 아주 천천히, 우리나라 산천처럼 굴곡지게.”

노래에도 뼈가 있다고 한다. 장사익의 말이다. 애국가처럼 온 국민이 다 아는 노래를 다르게 부르려면 자기만의 창법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가끔 장례식에서도 노래를 한다. 그런 자리에서 유행가 중에 으뜸은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로 시작하는봄날은 간다라고 했다. 봄날은 간다는 하나의 레퀴엠이에요. 그 상황에서 어떻게 부르는지, 그때 노래의 뼈가 나와요. 슬픔이 뚝뚝 떨어집니다. 그럴 땐 울어야죠. 가슴속 슬픔을 쓸어내려면 슬픈 노래가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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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익에게는찔레꽃’ ‘꽃구경’ ‘이게 아닌데를 비롯해 꽃이나 봄을 노래한 곡이 많다. 노래할 때 그의 눈에는 물기가 많다. 방송국 카메라는 놓칠세라 얼굴을 클로즈업하곤 한다. 입빠이 당겨요. 슬픔을 더 극대화하는 거죠. 무대에서는 딴 사람이 되는지, 제가 봐도 저 같지가 않아요. 하하하.” 그는허공을 보고 노래하는데 어떨 때는 아버지도 보이고 엄마도 보인다고 했다.

어머니 꽃구경 가요/ 제 등에 업히어 꽃구경 가요로 시작하는 노래꽃구경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짙어지자/ 아이구머니나/ 어머니는 그만 말을 잃더니/ 한 움큼씩 솔잎을 따서/ 가는 길 뒤에다 뿌리며 가네로 이어진다. 그리고어머니 지금 뭐 하나요/ 솔잎은 뿌려서 뭐 하나요/ 아들아 내 아들아/ 너 혼자 내려갈 일 걱정이구나/ 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하고 노래가 마무리되면 객석은 영락없이 눈물바다다.

장사익은 “<꽃구경>이 실은 요즘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했다. 나이 든 부모님을 요양병원으로 보내는 현대판 고려장 말이다.해외 공연을 가면 교포들이 그 노래 듣고 펑펑 울어요. 심란하다고꽃구경을 빼면 이렇게 항의해요. ‘무슨 소리여. 나 울려고 왔어. 한바탕 울려고 왔어.’ 그분들 대부분이 성공하려고 부모와 떨어져 모국 떠난 사람들이잖아요. 우리가 비극(悲劇)을 보는 이유도 그렇겠지요. 비 온 뒤에 세상이 맑아지듯이 다 울고 나면 개운해져요.”

그가 6 2일 서울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무대에 선다. 공연 제목꽃인 듯 눈물인 듯은 김춘수 시에서 가져왔다.희망과 절망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며 보낸 몇 개월이꽃인 듯 눈물인 듯한데, 하물며 우리 인생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고 장사익은 말한다. 2016년 초 성대에서 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고 8개월 동안 발성 연습을 하며 노래로 가는 길을 되찾아야 했던 시련이 담겨 있다. 노래를 잃고 지낸 시간은 눈물이었고 다시 부른 노래는 꽃이고 행복이었다. 몸에 나이테처럼 흔적도 남았다. 그는수술 후 목소리가 맑아졌지만 전처럼 파워풀하지는 않아요. 윗소리가 자신 있게 올라가지는 않고 가끔 뒤집어질 때도 있지요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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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하고 쉴 때는 다리 부러진 마라톤 선수처럼 앞이 안 보였어요. 좋아질지 나빠질지 의사도 몰라요. 영영 노래를 못 하게 되면 운전을 해야 하나 경비를 서야 하나. 막막했어요. 노래를 잃어버리고 나서야 알았지요. 내가 세상에 나온 이유가 이거구나. 나한테 인생의 꽃은 노래구나. 노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어요.”

꽃인 듯 눈물인 듯 1부와 2부가 영 딴판이다. 1부는 그가 지은 노래들을 부르고 2부는 전부 유행가다. 장사익은제 노래로 채우는 1부가 무겁고 어둡고 슬프다면 2부는 나이트클럽인 셈이라며관객은 울고 웃다가 나올 때는 개운해질 것이라고 했다. 일종의마음 샤워.세상 사람 열에 아홉은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잖아요. 그들에게 진정한 위로는 같이 울어주는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무대에는 장치도 조명도 포그도 장면전환도 없다. 장사익은빠르고 요란한 세상에서 느리고 고요하게 거꾸로 가는 것이라고 했다.

시를 노래로 옮기곤 한다. 잎사귀 하나가 가지를 놓는다/ 한 세월 그냥 버티다 보면/ 덩달아 뿌리내려 나무 될 줄 알았다/ 기적이 운다 기적이 운다/ 꿈속까지 찾아와 서성댄다/ 세상은 다시 모두 역()일 뿐이다로 흘러가는도 경북 영주에 사는 의사 겸 시인 김승기의 시에 곡을 붙였다. 우리 인생살이가 기차에 탈까 말까, 여기서 내릴까 말까라며 장사익이 덧붙였다. 서울역에 오도 가도 못하는 노숙자가 많잖아요. 잎사귀도 나무 한번 되어볼까 했는데 세상이 만만하질 않죠. 살려고 버둥거리고 아프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고.”

그에게 작곡이란 입 안에서 굴리고 흥얼거리며 길을 찾는 것이다. 장사익은 몸 어딘가에 스위치가 있는지 툭 건드리면 노래가 흘러나왔다. 요즘엔 윤동주 시자화상에 꽂혀 있다며 읊조렸다. 산모퉁이 돌아 외딴 우물을 찾아가 들여다봅니다/ 거기에 늙은이 하나가 있는데 걔가 미워져 돌아옵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가엾어 다시 와보니 늙은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장사익은자신만만하게 산 사람이 몇이나 있겠느냐우물 속에는 바람이 불고 구름이 흐르고 가을이 있고 내 모습과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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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순이 코앞이다. 노래 인생은 스물네 해밖에 안 됐다며 웃는다. 장사익이 직업을 전전하며 방황할 때 마지막으로 손에 쥔 게 태평소였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이 국악기를 붙잡고 3년을 배워 프로가 돼보자 마음먹었다. 한강변에서도 불고 이불 속에서도 불었다. 하찮은 것에 최선을 다하다 보니 뒤에 숨어 있던 노래의 길이 열렸다. 그때가 마흔여섯 살이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와 장사익의이게 아닌데를 들었다. 길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길의 무덤에 다다랐다고 여겼는데, 이제 시작일 수도 있구나. 입국장에 선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40대 중반의 남자가 나직이 노래를 흥얼거리게 되는 것이었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사는 게 이게 아닌데.

CREDIT

인터뷰어. 박돈규

조선일보 주말뉴스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