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낳은 위대한 걸작, 새로운 역사로 기록될 뮤지컬 〈모래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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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수많은 뮤지컬을 봐 왔지만, 커튼콜이 다 끝나고 로비로 나올 때 세대별로 이렇게 반응이 갈리는 작품도 드물었다. 젊은 관객이 “야, 정말 (옛날 드라마로 재미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재밌다”며 즐거워한 반면 연식이 좀 되는 관객은 “아무래도… (원작 드라마의 장엄한 아우라를 따라가기란) 무리겠지?”라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 중년 관객들이 뮤지컬이란 장르 자체에 익숙하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아주 수긍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 이 작품의 포스터를 봤을 때 가슴이 뛰었던 사람은 하나둘이 아니었을 터인데, 1990년대 중반에 너무 어렸거나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세대가 아니라면 대부분 그랬을 것이다. TV 본방 시간에 맞춰 사람들을 대거 집에 들어가게 했다고 해서 ‘귀가시계’라 불렀으며, 숱한 명대사를 23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회자케 했고, 가사도 무슨 뜻인지 모를 ‘백학’ CD나 테이프를 하나씩 사서 집에 두게 했던 그 전설의 드라마가 드디어 뮤지컬로 나온다니 말이다.

그런데 24부작(마지막 24회는 2회 분량이었으니 사실상 25부작)이나 되는 원작을 어떻게 압축할 것이며, 최민수(태수)-고현정(혜린)-박상원(우석)이라는 전대미문의 캐스트가 보여준 극한의 연기가 무대에서 제대로 재현될 것인가? 나름대로 예상을 했던 것은, 아마도 대단히 리드미컬한 압축과 특정 장면의 강조가 이뤄지리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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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은 어느 정도 맞았다. 뮤지컬은 마지막 장면에 해당하는 태수의 재판과 우석의 선고 장면을 맨 앞으로 끌어내, 이후의 이야기를 회상으로 처리하는 액자식 구성부터 몰입의 각슬 세웠다. 우석과 태수의 만남부터 태수 모친의 죽음까지 이어지는 일종의 전사(前史)인 원작의 1회는 ’17, 18, 19, 그리고 스무 살’이라는 넘버 한 곡이 이어질 동안 숨가쁘게 전개되는 것으로 처리했다. 압축이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면, 그것을 오히려 리드미컬하고 스피디한 장점으로 바꿨다는 점에서 빛나는 부분이었다.

뮤지컬은 곳곳에서 공을 많이 들였음을 실감케 했다. 교실과 요정, 하숙집과 감옥으로 순식간에 바뀌는 정승호의 박스형 무대는 효율적이었다. 대형 뮤지컬 치고는 지나치게 암울한 기조 속에서도 곳곳에서 실낱 같은 희망을 놓지 않게 만들어 원작의 결을 재현한 구윤영의 조명은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태수의 록, 혜린의 현악, 우석의 발라드로 캐릭터의 성격에 각을 세운 오상준의 음악은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넘버가 적다는 약점을 딛고 폭넓고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보였다. 주인공 세 명이 각자의 심정과 얼키고설킨 관계를 부르는 2막의 삼중창 ‘너무 늦지 않도록’은 그 중에서도 뮤지컬 장르의 힘을 보여줄 수 있는 백미라 할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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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의 넘버 ‘그만큼의 거리’에서 등장하는 파워풀한 검도 안무는 무릎을 칠 만했다. 사실 원작 드라마에서 무술감독을 맡은 인물은 이소룡의 유작으로 알려진 ‘사망탑’에서 악역을 맡았던 전설적인 무술배우 황정리였고 그는 극중 재희(이정재)의 선배 보디가드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 사실주의적 액션을 무대에 맞게 표현주의적인 액션으로 전환했다는 점에서 뮤지컬 무술감독 서정주는 하나의 모범을 제시했는 말을 들어야 한다.

어차피 클로즈업이 불가능한 무대 예술에서 원작 주인공들의 카리스마를 연기로 보여주기 어려운 일. 그렇다면 노래와 목소리가 부각이 돼야 한다. 배우들은 기대 이상의 호연을 보여줬다. 김우형(태수)과 강필석(우석)은 또렷하면서도 고저(高低)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발성이 돋보였는데, 이 배우들이 이렇게 잘하는 배우들이었나 새삼 감탄할 정도였다. ‘공연배달서비스 간다’의 빛나는 대표 배우 중 한 명인 김지현(혜린)은 상대적으로 적은 대형 뮤지컬 출연 경험에도 빼어난 소화력과 가창력을 보여줬다. 나긋나긋하면서도 운명적이고, 활달하면서도 청초한 목소리로 원작에서 고현정이 맡았던 캐릭터를 훌륭히 소화했다(동영상을 많이 시청하며 연구했는지 고현정과 목소리 톤도 비슷했다). 원작의 장도식(남성훈)과 강동환(김병기) 캐릭터가 결합된 ‘도식’역을 맡은 성기윤은 끝없이 이어지는 정치적 술수를 통해 권력을 가지고 노는 듯한 완전히 새로운 인물을 창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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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결국 이게 다 무슨 얘기였나? 파란만장한 모순의 현대사 속에서 각자 뜻을 펴려다 좌절하고 꿋꿋이 버티며 살아가는 청춘 또는 한때 청춘이었던 사람들의 이야기 아니었던가? 뮤지컬이 끝없이 계속되지만 결국 부질없는 모래시계의 이미지와 관련된 혜린의 회상에서 상당한 방점을 찍은 것은 수긍이 가는 대목이지만, 너무나 빠른 전개 속에서 이 요소들은 상당 부분 휘발돼 버린 점은 아쉬웠다.

결국 문제는 대단히 스피디한 전개 속에서 원작의 뼈대를 이뤘던 중요한 요소들마저 사라져 버렸다는 점이다. 그 유명한 태수의 ‘3종 세트’ 대사, ‘네가 생각하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 뭐야?’ ‘이렇게 하면 널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넌 내 여자니까’ ‘나, 떨고 있냐?’가 모두 삭제되었는데 반대로 이 대사를 그대로 두었다면 감정이 극대화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렇듯 많은 장점만큼이나 아쉬움도 남는 근본적인 이유는, ‘모래시계’가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콘텐츠라는 데 있다. 다음 공연에서 어떤 모습으로 변모할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뮤지컬 모래시계 공연정보

CREDIT

글. 유석재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